비목(碑木 : 죽은 이의 신원 따위를 새겨 무덤 앞에 세우는, 나무로 마는 비)
한명희 작시
장일남 작곡
1960년대 중반 ROTC 육군 소위로 수색중대 DMZ의 초소장으로 근무하던 한명희(작시자)는 어느날 우연히 잡초 우거진 곳에서 무명용사의 녹슨 철모와 돌무덤 하나를 발견했다. 그는 자기 또래의 젊은이가 조국을 지키다 스러져간 걸 안타까이 여겨 노랫말을 지었고, 가까이 지내던 작곡가 장일남이 이 노랫말에 곡을 붙여 가곡 비목이 탄생하게 되었다.
비목이 잉태된 지역은 화천 북방 백암산 우전방으로 행정구역상 철원군 원동면이었다. 철원 금성지역에서 흘러내리는 금성천이 북한강 상류와 합류되는 지점이 그의 근무지역이었다.
한명희씨가 근무할 당시 막사 주변 빈터에 호박이나 야채를 심을 생각으로 조금만 삽질하면 여기저기서 뼈가 나오고 해골이 나왔다. 땔감을 위해서 톱질하면 간간이 톱날이 망가지면서 파편이 나왔다. 순찰할 때면 계곡과 능선 곳곳에 썩어빠진 탄피 조각이며 녹슨 철모 등이 나뒹굴고 있었다.
어느 날 그 격전의 능선에서 개머리판이 거의 썩어가고 총열만 생생한 카빈총 한 자루를 주워왔다. 깨끗이 손질해 옆에 두고 곧잘 그 주인공에 대해서 가없는 공상을 이어갔다. 전쟁 당시 M-1 소총이 아닌 카빈의 주인공이면 소대장급에 계급은 소위였다. 그렇다면 영락없이 자신과 똑같은 20대 한창 나이의 초급장교로 산화한 것이 아닌가?
그는 카빈소총의 주인공에 대해 궁금증을 이어나갔다. 모윤숙의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처럼 먼 고향의 아내는? 아니! 그리운 초동친구는? 애틋하게 그리운 연인, 인자하신 양친, 장래의 진로, 사랑의 설계, 인생의 꿈은?
이렇게 왕년의 격전지에서 젊은 비애를 앓아가던 초가을의 어느 날 잡초 우거진 산모롱이를 돌아 양지바른 비탈길을 지나다 흙에 가려진 돌무더기 하나를 만날 수 있었다. 필경 사람의 손길이 간 듯한 흔적으로 보나 푸르칙칙한 이끼로 보나 세월의 녹이 쌓이고 팻말인 듯 나뒹구는 썩은 나무등걸을 보면 예사로운 돌들이 아니었다.
제대 후 TBC 음악부 PD로 근무하면서 우리 가곡에 관심을 쏟던 어느날 방송일로 자주 만나는 장일남씨로부터 신작 가곡을 위한 가사 몇 곡을 의뢰받았다. 한명희씨는 곧바로 군 시절 보았던 장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첩첩산골 이끼 덮인 돌무덤 옆에는 새하얀 산목련이 있었다. 그는 이내 화약 냄새가 쓸고 간 그 깊은 계곡 양지녘 이름모를 돌무덤을 포연에 산화한 무명용사로, 그리고 비바람 긴 세월 동안 한결같이 그 무덤가를 지켜주고 있는 그 새하얀 산목련을 주인공 따라 순절한 여인으로 상정해 사실적 어휘들을 문맥대로 엮어 시를 써내려갔다.
- 출처 : 오마이뉴스( 기사)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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